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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쳐가는 비

* 사마토키가 재회한 우자메에게 아직은 전부 마음을 열지 않았던 때에 있던 일입니다.


빗방울은 온갖 것을 타고 흐른다. 모든게 흐르는 물줄기에 씻겨 내려갔으면 하는 인간도 있겠지만, 흘러가지 않는 것도 있다. 비릿한 핏물이라면 씻겨내려갈지도 몰라도 비는 모든걸 없던 걸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거칠게 다뤘지만 관리가 꽤 들어간 듯한 신발 밑창이 물웅덩이를 세게 내리친다. 튀어오른 물방울은 다시 바닥에 부닥쳐 웅덩이로 흘러간다. 변덕스러운 바람이 불어오자 빗줄기는 이리저리 사선으로 흩날렸다. 어두운 우산 천을 세게 두들기는 소리와 우산으로 막지 못한 빗줄기가 무척 거슬리는 지 사마토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마토키는 습기가 옷을 스며들어가는 느낌을 좋아하지 않았다. 툭히 그가 신고 다니는 신발이라면 더욱더. 자신의 컬렉션을 정성스레 관리하긴 하지만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애시당초 그의 직업 상 온전히 관리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이런 날은 안 나오는게 맞지만 그렇다고 안에 틀어박혀 있자니, 요코하마란 거리는 항상 드글거리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에 이렇게 자신이 돌아봐주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곤 했다. 그렇지만 이 습기 전부가 불쾌했다. 비를 쏟아내는 우산을 들고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마토키의 뇌리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아 그러고 보니까 베란다에 옷을 뒀던가. 잠깐 나갔다오는 사이에 기습적인 소나기가 내려서 네무와 집 안으로 뛰쳐들어와서 비에 다 맞아가면서 옷가지를 가져나왔던게 기억이 난다. 더 생각해봤자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할 지 아는 사마토키는 어디선가 담배라도 태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걸음 걷자 사마토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적당한 틈을 찾았다. 건물의 지붕에 어쩡쩡하게 가려지는 지 틈의 반정도는 비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거 럭키구만. 그는 우산을 들고 담배 피는 건 불편해 했으니 말이다.

그 틈에는 이미 손님이 한 분 있었다. 누가 있는 걸 보고 작게 욕짓거리를 하고서 다른 골목으로 향하려던 사마토키는 걸음을 멈췄다. 세상을 덮는 빗소리 피해 틈으로 숨은 것처럼 건물 벽에 기대 앉아있는 손님은 사마토키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청승맞게 뭐하고 있냐."

으슥진 벽에 붙어있던 관이 토하고있는 물줄기의 큰 소리가 그 둘 사이를 채운다. 그렇지만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앉아있었다. 어두운 색 후드 사이로 연보라빛 머릿결이 흘러내려와있었다.

자신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라 생각하며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점차 걸음을 늦췄다. 바닥에 꼬라박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 전체가 으슬으슬 떨리고 있었다. 옷이 젖어있고 근처에 우산도 없는게 이 비를 그대로 맞은게 틀림없었다.

"..."

폭이 넓지 않은 골목에서 사마토키는 상대의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아니 상대는 못한 것이 맞겠지. 설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여, 우자메."

우자메의 앞에서 우산을 들고 똑같이 쪼그려 앉은 사마토키는 그녀를 불렀다. 평소라면 눈을 반짝이면서 자신을 봤을 텐데, 사마토키가 앞에 있는 사실이 아닌 그저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다. 사마토키는 손을 뻗어 우자메의 턱을 더 높게 들어올린다. 면상을 보니...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약 했냐?"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의 지붕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우산에 부딪혀 내는 탁-탁- 소리만 들렸다. 우자메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밝은 분홍빛을 띄던 눈동자를 뒤덮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그녀 때문에 사마토키는 좀 당황스러워 했다. 질리도록 엉겨붙어오더니 비가 올 때에는 이렇게 저기압인가. 지금까지 그런 적 없었는데. 비 오는 날을 떠올려보니 한 번도 비가 올 때 그녀는 자신을 만난 적이 없었다.

"뭐, 그러면 됐어."

약 했으면 바로 끌고갈 생각이었지만 그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이럴 땐 홀로 마음을 정리하는 게 더 낫다. 어줍잖은 놈이 끼어들어봤자 긁어 부스럼이다. 특히 생사도 모르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다시 보게 된 관계라면 더욱더 아는 체를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사마토키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이자 우산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지붕 아래 빗물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에 떨어져 점을 만든다. 다른 곳 가서 펴야겠구만. 중얼거리던 사마토키는 그대로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슬쩍 다시 골목을 보니 우자메는 거동조차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생각보다 더 깊숙한 곳에 앉아있었다. 지나가면서 꼼꼼히 보지 않으면 그녀가 저 구석에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사마토키는 우뚝 서서 골목을 바라봤다. 어서 다른 곳으로 가자며 보채는 빗바람이 그의 하얀 셔츠를 끌어채도, 가만히 우자메를 주시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 사이를 가득 매우던 비 내리는 소리 사이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걸음을 돌려 다시 사마토키는 골목을 걸어들어왔다. 그는 이번에는 우산을 접어 대충 벽에 기대놓고 지붕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우자메의 바로 옆까지 걸어와선 그는 털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자신이 이런 행동 하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러고 싶으니까 하는 거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익숙하게 한 개비를 물고 라이터도 꺼냈다.

가볍게 열리는 쇳소리가 나더니 휠을 손끝이 굴렸다. 사마토키는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크게 숨을 들어마쉬고 그는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평소라면 단순히 생명유지를 위해 하던 호흡이 담배 하나 문다고 해서 잡념을 털어내는 게 가능했다. 이 연기가 자신이 숨쉬고 자각하게 하기도 했다.

"사마토키...?"

아까 옆에 털썩 앉으면서 건드렸는지 우자메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텐션이 낮긴 했지만 이번엔 제대로 상대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우자메의 시선에 담기고 있는 걸 이제야 본 사마토키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제야 본인답게 구는구만.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자신이 그녀를 걱정했다는 것 같았다. 전혀 걱정 같은 거 안 했어. 자신에게 그렇게 되내이며 금세 짜증섞인 얼굴이 된 사마토키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우자메의 얼굴에 대고 연기를 불어버렸다. 방심하고 그를 보고 있던 우자메는 기침을 연신 토했다.

"큭, 아니 갑자기 사람 얼굴에."

손을 휘적거리면서 우자메는 연기를 물렸다. 금세 연기가 빗줄기에 녹아서 사라졌다. 지금 갑자기 나타나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던 우자메는 갑작스레 자신 앞에 들이밀어진 것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마토키는 담배를 입에 물고 담배갑에서 하나 가져가란듯 우자메 앞에 내밀었다.

우자메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 개비를 끄집어냈다. 담배를 피긴 하지만 보통 혼자 있을 때만 폈다. 누군가가 있든 말든 입만 내밀어 담배를 필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살갗은 조각이라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담배를 건네받았지만 습관적으로 누군가가 옆에 있기 때문에 우자메는 천천히 입에 담배를 물었다.

아, 라이터. 정신 없이 밖으로 나와서 라이터가 없을텐데란 생각이 스쳤다. 바지 주머니를 털어보려던 우자메에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무언가가 날아들어왔다. 센스 좋게 받아챈 우자메는 그게 사마토키가 쓰던 지포 라이터란 걸 알아챘다. 힐끔 옆을 보자 사마토키는 딱히 신경 안 쓰고 다시 담배 피는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자메는 담배를 물고 성급하게 휠을 굴렸다. 어서, 어서. 재촉하는 마음이 그 쉽게한다는 불붙이기도 못하게 만들었다. 타닥 소리만 날 뿐, 불이 붙지 않았다. 옆에서 타닥-타닥 소리만 내면서 불은 못 붙이고 있으니 사마토키는 자신의 라이터를 낚아챘다. 더럽게 불 못 붙인다면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옆에서 시원하게 불 켜지는 소리가 난다.

"대."
"내가 할 수 있는데."
"잔말말고 대라."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가 다시 옆에서 타닥-타닥 거리고 있으면 사마토키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였던 우자메는 결국 입에 문 자신의 담배의 끝을 불에 가져갔다. 우자메는 드디어 조금씩 타들어가는 담배를 들이쉬고 내셨다. 구부정하게 등을 굽히고 구석에 박혀있던 몸이 담배 연기에 벽에 등을 붙이고 이제야 제대로 핀다. 불안정한 호흡이 담배 연기를 서둘러 삼킨다. 도망갈 수도 없던 사람이 어딘가 도망가야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 모든걸 사마토키는 담배를 피면서 조용히 자신의 눈으로 담고 있었다.

아까까지 빗소리만 가득하던 골목은 어느새 새뿌연 담배 연기로 차있었다. 불안하게 연기를 뿜어내던 우자메도 이젠 저 너머의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편안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 둘다 그 어느 말도 없이 있는게 우자메의 마음에 걸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어릴 적은 무척 비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비는 항상 오지 않았으니까 드물게 오는 즐거운 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였나, 언젠가부터 안 좋은 일들은 비와 함께 찾아오곤 했다. 작은 소나기라면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몰아치듯 오는 빗바람 소리를 들으면 우자메는 멀쩡한 사람처럼 있기 어려웠다.

오늘도 그랬다. 흐린 하늘이 기어코 비를 퍼붓기 시작했을때에는 집 구석에 박혀있었다. 몽유병처럼 또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까봐 불안해했다. 그리고 낯선 골목길에서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야도 소리도 히끄무리한게 고장난 것 같았다. 익숙한 감각에 물들여진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비를 쏟아버리는 하늘은 보기가 싫어서 비가 떨어지는 바닥을 봤다.

그러다가 우자메는 인기척을 느꼈다. 무시하기엔 새하얀 머릿결이 옆에서 살랑거리는게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돌아본 옆에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 인물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연속된 상황이다. 담배를 얻어서 누군가의 옆에서 피고 있다. 희뿌연 시야에서, 먹먹한 소리 사이에서 사마토키는 선명했다. 깨지 않을 것 같던 안개 속 풍경이 어느기점으로 걷혀갔다. 평화롭게 빗소리가 땅바닥을 두들기고 있다. 쏴아- 하는 바람소리에 비가 함께 흔들거린다. 이렇게 평화롭게 비오는걸 본적이 있던가.

"... 그"
"지금 굳이 말할 필요 없어."

우자메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내려하자 사마토키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도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그 말투는 어떻게 들으면 관심이 없는 걸로도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나중에 말하면 들어주겠다란 늬앙스를 풍겼다. 그것만으로도 우자메는 솟구치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이 감정이 분명 자신이 어릴 적에 의지할 수 있었던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항상 그녀는 사마토키에게 느끼는 감정을 친구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말 안해도 돼. 입다물고 담배나 더 피던가."
"그렇게 많이 피면 나중에 페렴으로 죽는거 아냐?"
"페렴 걸리기 전에 뒈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 안 하냐."
"하긴 우리는 그렇지."

자조를 흘리면서 우자메는 마저 담배를 피려다가 문득 하늘을 봤다. 점점 빗줄기가 얇아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좀 맑은 것 같기도 하네. 담배를 바닥에 지져서 끄면서 우자메는 조금씩 떨어지는 물방울 주시했다.

"고마워."

사마토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신경쓰이는 게 있었던걸까 그냥 담배를 계속 펴도 될텐데 그는 우자메를 봤다. 아까까지 물방울을 보던 그녀도 사마토키를 보고 있었다. 우자메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걱정되서 챙겨준거잖아?"

새하얗게 질려서 허공을 보던 눈이 생기가 넘친다. 평소와 같이 장난끼 많은 모습이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햇빛이 서서히 드러나며 점차 밝아져오는 골목때문에 그녀의 미소는 생각 이상으로 부드러워보였다. 그녀가 사마토키 앞에서 이렇게 웃은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어릴때.

사마토키의 기억 속에 파묻혀있던 우자메의 웃는 얼굴이 지금의 표정과 일치했다. 이런 실 없는 건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마토키도 우자메를 따라서 실없게 짧게 웃고 만다.

"웃으니까 이쁘네?"
"하?"

심각한 얼굴로 우자메는 사마토키의 얼굴을 보면서 감탄했다. 얄상한 얼굴로 조직의 2인자냐는 말을 여러번 시비투로 들었던지라 사마토키는 날세게 반응했다.

"아니 근데 진짜..."
"뭐하는거냐, 놔라."

우자메는 덥썩 손으로 사마토키의 얼굴을 잡아서 자신의 쪽으로 돌려서 봤다. 아쉽게도 아까 그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기분 나쁜 티 팍팍 내는 사마토키만 있었다. 우자메가 손을 떼주자 사마토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어. 나 간다."
"아? 어디가-"
"너 없는 곳으로!"

사마토키는 짜증이 섞인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이 벽에 기대둔 우산을 스쳐지나갔다. 우산 같은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우자메는 그대로 그의 뒤를 따라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이 거리를 걸어가는 그들 머리 위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최소한 그 우산은 필요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