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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


"사 ...ㅁ ...토 키... 나 여깄어."


잠이란 건 딱히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은걸 기억하게 만든다. 정신차려서 빠져나오고 나면 빌어먹을 일상이 다시 시작된다. 그 시시한 기억을 짓밟고 현실로 발을 움직이는게 당연했다. 그런게 당연했는데,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이 오기 전 누군가가 날 붙들어 깨웠다. 손이 누가 잡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꿈벅거려 눈 앞을 주시한다. 자신이 눈을 뜨자 앞에 있던 사람은 몸을 뒤로 물린다. 시간은 이미 늦었는지 거대한 창 밖은 고요함 속에 혼란을 감춘 요코하마의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밤의 빛은 연보라빛 머릿결에 물들어 있었다. 약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마토키를 보면서 우자메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쯧. 사마토키는 흐트러진 머리가 귀찮은지 한 번 털어버렸다. 우자메가 자신의 바로 옆에서 팔을 괴고 누워있었다. 여기가 본인 안방인 것처럼 누워있는게 퍽이나 어이없었다.


"네 놈 왜 또 여기서 드러눕고 있는건데."
"아니야 나 오늘은 옷 갈아입었어? 저번에 화내길래 침대 안 더러워지게 옷 갈아입었다고?"
"하? 옷은 또 어디서 나서."
"어? 네 옷방?"


씨발. 잠에서 깨자말자 한계점을 어디까지 테스트하려고 하는 거냐. 귀찮다고 문 안 열어주면 열 때까지 네 놈이 초인종을 눌러대서 귀찮아서 스페어 키를 갔다 던져버린 내 잘못이냐. 조용히 집 안에 기어들어와서는 사람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를 않나, 남의 냉장고에 식재료를 가져다 두질 않나, 남의 주방에서 사고를 치지 않나, 온갖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하고 있다. 이제는 하다못해 남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어? 어디까지 눈치가 없을건데.


"이 옷 입었는데 좀 그..."


옷에 관심이 많은 사마토키가 옷을 말끔하게 정리해놓고는 했다. 본인이 사들인 빈티지 의상들이 여러벌이라고 해도 옷 관리는 철저했다. 아마도 우자메가 말하려던 건 옷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비해서 옷이 크다고 말하려고 했던게 분명하다. 같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서 옷의 상태를 보여주려던 우자메의 손을 내리치듯이 사마토키가 막았다.


"아 뭐 됐어! 입고서 제대로 갔다 놔."
"옷이 좀 헐렁해."


당연하겠지 너랑 내가 키가 얼마나 차이 나는데. 우자메의 말에 대답했다가 사마토키는 말을 잇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는 이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우자메는 그 손짓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지금 사마토키는 뭔가 상상해버린 자신에게 현타가 왔으니 말이다.

...이 씨발. 그 놈의 소꿉친구 못 갔다버려서 환장인 애 데리고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내가 왜 쟤를 좋아하게 되서 이런 상황에 놓인건지. 언제까지 모른 척 하나 했더니 이건 그냥 그쪽으로 센스가 전혀 없는 놈인건가. 마음이 없었으면 이미 진작에 나가떨어졌을텐데.

우자메는 자신을 보면서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는 사마토키가 어떤 일로 그러는 지 몰라서 자신이 사마토키의 옷을 입는게 싫었나 싶어졌다. 물론 그 생각은 1초도 못 가서 베란다 저바깥으로 집어던졌지만 말이다. 그랬으면 사마토키 성격에 옷을 바로 뺏어버렸을 거라며 우자메는 식은땀에 붙은 하얀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괜찮아?"
"뭐가."
"답지 않게 땀 흘리고 자서 걱정했어."


식은땀을 닦아주는 손짓 하나는 부드러워서 자신이 허튼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걱정할꺼면 최소한 눈치정도는 챙겨줘야하지 않냐. 불만가득한 생각을 여럿 하지만 사마토키는 그녀의 손길을 막지 않았다.

"나 여깄어."

그러고 보면 자신을 깨울 때 우자메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아직 잠에서 다 깨지 않은 사마토키는 나른한 목소리로 우자메에게 물었다.


"... 내가 너 불렀냐."
"응?"
"그러니까 아까 잠결에."
"... 슬금 들어왔는데 내 이름 중얼거리고 있어서 손잡아주고 했던게 다야."


잠결에 자신을 불렀냐는 말에 시계의 초침이 멎듯이 우자메의 손이 멎었다. 우자메의 시선이 아까와 달리 사마토키의 눈을 향하고 있지 않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마토키는 그저 자신의 손가락으로 우자메의 긴 머릿결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적막을 깨운 건 사마토키의 대답이 아니었다.


"뭐 물론 농담이지만."
"... 하?"


사뭇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던 사마토키의 얼굴이 일순간에 평소의 언짢은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바로 직후에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할 틈도 없이 그랬으니 감동이고 뭐고 어이가 없었다. 언성을 높이려다가 사마토키는 굳이 내가 애새끼같이 이딴 짓거리를 왜 해야하나 란 생각에 이불을 끌어올리고선 눈을 감았다.


"빡돌게 하지말고, 처자라."
"하? 너무해. 이 우자메'님'한테 처자라니."
"아니면 안 자고 이 몸 옆에서 귀찮게 굴고있을게 분명해서 그렇잖냐. 그리고 지금 그거 나 조롱한거냐 그런거지?"
"그렇게 빨리 말하면 못 들으니까 우리 사마토키'님' 천-천히 Slowly."
"이 밤에 화나게 하지마라. 처자라...


우자메의 말을 뒤로 하고 그녀가 보이지 않게 그냥 그대로 뒤돌아서 누워버렸다. 사마토키 나름대로 본인은 자겠다고 입장을 표력했다. 그렇지만 뒤이어 날아드는 우자메의 말은 이랬다.


"헉 그러면 옆에서 이러고 있으면 안 자고 나랑 놀아줄꺼야?"
"말을 좀 말로 할 때 알아 처들으라고!!"


결국 사마토키가 베고 있던 베개가 우자메의 얼굴로 직격으로 날아들었다. 몸 센스는 좋아서 얼굴로 날아들기 전 우자메는 시트에 바짝 누워서 날아오는 것을 피했고, 베개는 침대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바로 직후 우자메는 사마토키가 자기 쓰라고 꺼내준 베개를 집어들었다. 다음 타격을 기다리는게 제법 다음 공 던져달라고 눈 반짝 거리고 있는 개 같았다. 그 눈빛을 보다 못하다가 사마토키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성큼성큼 바닥이 울릴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다른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내 다시 빠르게 우자메가 앉아있던 침대로 옷가지를 던졌다.


"그리고 옷 그거 안 어울리니까 이거나 처입어!"
"ㅇ어.. 어! 옷 갈아입을게!"
"내가 나간 다음에 처입으라고 염병할!"


옷을 끄집어올리려 하자, 사마토키는 이내 서있다가 뒤로 돌아서서 우자메를 보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쾅-! 하고 닫힌 문소리에, "아 맞다 얘기를 안 했네."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옷 갈아입을테니까 나가줄래라고 이야기했겠지만 지금은 케이스가 다르다. 우자메의 주의는 아까 벌어졌던 일에 온통 쏠려있었으니 말이다.


사마토키의 자는 모습을 꽤나 좋아해서 우자메는 몰래 잠깐 들어왔다가 나가곤 했다. 밤에 할 일들 다 끝내고 나서 하루를 끝마치는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란 정말 좋았다. 사마토키는 간혹 깨기도 했지만 자신이 그 앞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깨지 않는게 신기했다. 오늘도 그렇게 찾아왔다.


저번에 분명 침대에 누워있어서 화를 냈으니까 사마토키의 옷장에서 흰 셔츠와 바지 하나를 꺼내서 입었고, 곤히 자고 있을 사마토키의 곁으로 가서 누웠다. 오늘은 옷 갈아입었으니까 이불 안에 들어가도 뭐라고는 안 하겠지? 물론 허락은 안 받았지만.

"... 자메..."
"응?"

이불 정말 좋은거 쓰는구나싶어서 감촉을 만끽하던 와중에 우자메는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아무래도 자고 있던 그가 중얼거리는게 분명했다. 이불을 덮은 채로 그에게 조금조금 다가간 우자메는 그 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

"... 우자메."

분명 본인 이름이었다. 다만 악몽 같은 걸 꾸는 지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이런 적 없었는데 식은 땀도 흘리고 있었다. 여기서 이대로 깨우면 분명 화를 낼텐데. 그렇다고 조용히 이걸 넘기자니 우자메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우... 자메"

"우자메."


살짝 이마에 맺힌 땀이 바깥의 빛에 받아 반짝거린다. 눈을 감고서 손에 힘을 꽉 주고선 애처롭게 자신을 부르는 사마토키를 거부할 힘이 우자메에겐 없었다. 애초에 손이 뻗는걸 어쩔 수 없었다.

살짝 차가운 손을 붙잡는다. 장난스러운 말투는 어디가고 우자메는 부드럽게 사마토키를 불렀다.


"응? 사마토키, 나 여깄어."


네 옆에 있어, 여기. 그렇게 안 찾아도 이제 난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건데. 아까까지의 상황을 잠깐 멍때리면서 옷을 손에 들고 있던 우자메의 결론은 이랬다.

" 그렇게 평소에 날 불러줬으면 좋겠다. 사마토키."

생각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왜일까... 의문을 품은 말은 무의식적으로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그 고민이 잠깐 가지못한건 아무래도 바깥에서 옷을 입는거냐, 옷을 안에서 해체를 하는거냐, 옷에 문제 생기면 가만 안놔둔다는 날센소리 때문이었다. 우자메는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고선 문을 열고 나갔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침실에 둔 채로 나가버렸다.